모던블루 + 해석에 正하여

시대의 멜랑콜리와 정직한 글쓰기

양석준··수정됨 2026년 5월 22일

모던블루

홀로의 나약한 우리는 정상적으로, 잘 욕망하기 위하여 다양한 개념을 만들어 생존의 체계를 발명해왔습니다. 고대의 우리 생활은 자연의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물과 불, 바람과 동물 등 자연상태에 놓여진 인간의 생존은 그들에 의해 크게 위협받았으며 자연물을 숭배하는 애니미즘, 그 중 가장 크게 두려워하는 대상을 숭배하는 토테미즘, 그 밖의 당시 지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들을 숭배하는 샤머니즘으로 꾸려나간 생존의 체계, 인간으로 잘 작동하기 위한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을 발명하여 꾸렸습니다. 중세의 우리는 더이상 자연물이 두렵지 않습니다. 비가 오지 않아도 저장해둔 물을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으며, 공동체와 함께라면 어떤 동물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로 두려운 대상은 사람이었으며 사람의 형상을 한 신을 발명하여 숭배하고, 생존을 위한 테크놀로지로 사용했습니다. 생활의 양식이 고도화되어 안락한 상태에 녹아든 현대인들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두렵습니다. 돈, 관계, 사랑, 의미, 미래, 인정, 성공과 실패, 권위, 정상성, 진리, 숭배 그 자체와 같은 것들은 지극히 개인적 맥락 안에서 두려움의 대상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여러 두려움의 대상들의 혼합물을 숭배하는, 하이퍼-숭배를 통해 인간으로 존재함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현대의 비이성은 두려움의 대상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체화된 숭배를 방어기제처럼 붙들고 있습니다. 무엇을 숭배하는지 식별하자는 시도는 신성의 모독과 같은 체계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짐과 동시에 경시됩니다.

그러나 온전한 상태의 인간은 누구나 의미있는 삶을 살고자 하며 가치있는 것을 지켜나가는 삶을 원합니다. 조롱조로 사용한 숭배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상황에서 누구나 하고싶어 마지않는 것 따위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실천적 의미의 예술 작품의 감상은 비이성적 하이퍼-숭배의 루프를 끊고, 두려움의 대상을 구체화하고 이를 통해 왜곡되지 않게 욕망하며 진지한 태도의 삶을 주체에 요구하는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술 작품을 보고 느끼는 불편함이나 끌림, 충만함 등 추상적인 감정 아래에는 우리 각자의 진리가 묻혀있습니다. 철학은 추상적 개념을 보편적인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느끼기 힘든 추상적인 감정을 예술 작품의 감상이라는 사건을 통해 각 주체의 세계 내에서 보편적인 언어로 설명함을 통해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탐사할 수 있습니다. 예술 작품의 실천적 감상은 철학을 호명합니다. 우리는 다시 철학해야만 합니다.

해석에 正하여

예술 작품은 공격받습니다. 이론가들은 백과전서적 지식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고작 재고처럼 쌓아둔 지식을 부스트래핑하는 수단으로 비평합니다. 그들은 감상에 대해 정직하지(正) 않으며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온 작업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들의 시간이 가치있었음을 방어하고자 예술 작품을 남용합니다. 정신분석학 연구자들이 예술작품에서 환원주의적으로 리비도 내지는 팔루스를 발견함은 단순히 지식을 재확인함 이외의 학술적 가치가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의미들을 봉합하여 예술 작품이 순전히 예술임 만으로 가질 수 있는 의미조차 억압합니다. 기존의 아이디어를 답습하고 새로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제시하지 않는 예술 작품은 보편적으로도 좋게 평가받기 어렵습니다. 예술 작품에 대한 글쓰기는 어쩌면 예술 작품에 가해지는 엄중한 잣대보다 더 높은 기준을 갖고 평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 글을 씁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뿐만 아니라 생활하며 겪는 일상적인 사건들조차 우리에게 침묵을 선사하며, 침묵은 언어화되지 않은 잔여물을 남깁니다. 남겨진 것, 마주하지 못한 것은 종종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잔여의 지점을 탐사하는 것을 막는 것은 대개 타자의 언어입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라는 식의 판단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기존의 잘 정돈된 세계의 질서로 인해 가로막히는 것은 언어의 상징적 차원 뿐만이 아니라 주체성으로 향하는 과정 그 자체인 진리의 탐사입니다. 주체를 향한 주체의 요구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침묵을 타자의 언어가 아닌 자신의 언어로 받아적어야 합니다.

기고하는 것이 아닌, 학술적이지 않은, 실천적인 글쓰기, 행위에 중점을 둔 글쓰기에서는 읽힐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습니다. 가상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깎아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고작 주위의 소수에게 공유하기 위하여 맘에도 없는 이론적 토대를 보충한다거나 단락을 나누는 것은 글을 쓴다는 것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과소평가하며, 내가 쓰는 글이 완결될 것이고 읽힐 것이다라는 생각은 오만합니다. 침묵을 언어화한다는 목적에서의 글쓰기는 아포리즘이 허용되는 희귀한 영역 중 하나이며, 내가 쓰고싶은 단어를 골라 쓰고, 원하는 구조를 골라 논증을 자유롭게 배치하고, 작품과 나 사이의 끌림의 자리를 구체화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말함에 부담이 없습니다. 침묵에 정직한 글만이 해석입니다.


Tuché

두 글은 같은 자리를 두 방향에서 봅니다. '모던블루' 는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며 어떻게 그것을 잘못 숭배하는지에 대한 글이고, '해석에 정하여' 는 그 두려움을 자기 언어로 받아적는 일에 대한 글입니다. 두 자리가 만나는 곳이 튀케입니다.

튀케는 흘러내림의 자리, 익숙한 언어의 회로가 미끄러지는 순간, 함수와 같은 일상이 잠시 멈추고 무언가가 들어오는 틈입니다. 우리는 그 틈을 만들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왔을 때 알아챌 수 있을 뿐이고, 알아채는 일이 정직한 감상이며, 자기 언어로 받아적는 일이 정직한 글쓰기입니다. 저는 원래 클로드에게 제가 쓴 글을 비판하라고 지시하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 글은 제가 맞습니다.

현대의 만연한 비이성을 예술 작품이 주는 침묵의 순간에 정직하게 감상하고, 정직하게 적어냄을 통해 알고 잘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발제 1. 여러분은 글을 왜 쓰시나요?

발제 2. 여러분은 무엇을 두려워하시나요?

발제 3. Tuché에서 좋은 글쓰기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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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블루 + 해석에 正하여 — Tuché